2010년 6월 16일 수요일

(경향)미국 CNN이 본 ‘세계 월드컵 정치사'

“어떤 사람들은 축구가 삶과 죽음의 문제라고 말한다. 나는 그런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축구는 삶과 죽음의 문제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1981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리버풀의 전설적인 감독 빌 샹클리는 세상을 떠나기 전 ‘축구라는 아름다운 경기의 중요성이 과소평가돼 있다’는 것을 이렇게 지적했다. 이는 축구팬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3S(Sports·Sex·Screen) 정책’이란 말이 있듯이 정치는 축구를 이용해 국민의 눈과 귀를 막아온 역사가 있다. 월드컵이 시작된 후 축구는 혁명의 동기가 되기도 하고,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평화를 받아들이게도 하고, 갈라졌던 세력을 뭉치게도 만들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은 세계사 이면에 어떤 기록을 남길까. 미국 CNN 방송은 최근 남아공 월드컵을 맞아 ‘세계 월드컵 정치사’를 소개했다.


무솔리니의 ‘맨인블랙’

◀ 1934년 이탈리아월드컵 공식 포스터

일 두체(베니토 무솔리니 별칭)는 축구를 정치에 ‘악용’한 대표적 인물이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를 1934년 제2회 월드컵 개최지로 선정하는 것부터 월드컵 운영 방식, 심판매수 등 국민들의 관심을 월드컵으로 돌리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무솔리니는 우승컵도 줄리메컵보다 6배 큰 ‘코파델두체’라는 우승컵을 별도로 만들었다. 이탈리아는 우승에 앞서 준결승에서 당시 유럽 축구 강호였던 오스트리아와 만나 2대 1로 승리했다.

오스트리아의 요세프 바이칸은 그 경기를 이렇게 기억한다. “이탈리아전에서는 심지어 심판들도 그들(이탈리아)을 위해 뛰었다. 나는 우리팀 선수를 향해 공을 패스했지만 심판이 앞서 공을 이탈리아 선수에게 밀어줬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치에 굴하지 않은 오스트리아 영웅

마티아스 진델라(오스트리아 선수)

30년대 오스트리아 축구 대표팀은 유럽 최고의 실력으로 ‘기적의 팀(wonderteam)’이라 불렸다. 3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나치 독일은 그해 3월 오스트리아를 강제 합병한다. 나치는 독일팀의 실력을 오스트리아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했다. 나치는 오스트리아 선수들을 영입했는데, 주장 마티아스 진델라는 이를 거부했다. 같은 해 4월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시합을 벌인다. 진델라는 “오스트리아가 이겨서는 안된다”는 나치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2대 0으로 승리를 이끌었다. 첫번째 골이 터졌을 때 진델라는 오스트리아 관중 앞에 섰고, 두번째 골이 나왔을 때는 나치 관료들 앞에서 축하 세리머니를 선보였다.

진델라는 이듬해 자신의 아파트에서 연인과 함께 가스 유출사고로 서른 여섯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가 오스트리아 대표팀을 잃고 상실감에 자살했다는 소문과 함께 살해당했다는 음모설이 제기됐다.


독립위해 출전 포기한 알제리 선수들

축구는 알제리의 독립전쟁의 한 방법이었다. 1830년대부터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은 알제리는 1954년부터 민족해방전선(FLN)을 중심으로 8년간 격렬한 독립전쟁을 벌였다. 전쟁 중이던 58년 스웨덴 월드컵을 맞아 프랑스는 알제리 선수들을 자국의 국가대표팀으로 차출하려 했다. 한편으론 알제리인들에게 명성과 부를 누릴 수 있는 하나의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알제리 선수들은 프랑스를 위해 뛰지 않기로 결정하고 튀니지에 있는 FLN 본부로 모였다. 그리고 체포 위험에도 불구하고 ‘불법’ 대표팀을 만든다. 프랑스 프로리그 생테티엔에서 뛰면서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바 있는 라시드 마프루키는 알제리 불법 대표팀 합류에 대해 “주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선택으로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하게 된 그는 “나는 나의 클럽을 버리고, 월드컵에 대해 생각했다. 나의 조국의 독립과 견줄 만한 것인지를…”이라고 말했다.


축구전쟁

69년 중미의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70년 멕시코 월드컵을 앞두고 북중미 최종예선에서 벌인 경기는 말 그대로 전쟁이 됐다. 그해 6월15일 엘살바도르에서 열린 경기에서 원정 응원을 온 온두라스 국민들이 홈 관중들에게 몰매를 맞았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온두라스에선 이를 계기로 엘살바도르인들을 겨냥한 무차별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엘살바도르는 세계인권위원회에 온두라스를 고발했고, 온두라스는 엘살바도르 상품 수입금지로 맞섰다. 8일 뒤 양국은 국교를 끊었다. 7월14일 엘살바도르의 온두라스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됐다. 미주기구(OAS)의 중재로 같은 달 29일 엘살바도르가 무조건 철수했지만 평화협정은 80년에, 국경 확정은 2006년에야 마무리됐다. 이 전쟁으로 5000여명이 희생됐다. 이 전쟁의 이면에는 양국의 영토확장을 둘러싼 국경문제가 있었다. 또 온두라스에서 엘살바도르 이민자들이 경제적 실권을 쥐고 있었는데, 온두라스는 69년 농지개혁을 하면서 엘살바도르인들을 제외하고 추방했다.

두 국가의 군부는 축구 경기장에서의 폭력사태에 관한 소문을 선동하면서 고조된 상대 국가에 대한 반감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목숨 걸고 시합한 자이르 선수들

일룽가 음웨푸(자이르 선수)

74년 서독 월드컵 때는 월드컵 역사상 가장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월드컵에 처음 출전한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는 같은 조였던 유고슬라비아에 9대 0이라는 기록적인 골차로 대패했다. 그리고 브라질과의 경기. 3대 0으로 뒤져있던 상황에서 브라질이 프리킥 기회를 얻었다. 그 순간 자이르의 일룽가 음웨푸 선수는 축구 경기의 룰을 망각한 듯했다. 음웨푸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기 전 본인이 공을 먼저 차버렸다. 하지만 해프닝의 이면은 훨씬 어두운 것이었다. 음웨푸의 행동은 모부투 세세 세코 대통령의 충성 부하들이 선수들에게 “만약 브라질에 3골차 이상으로 진다면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협박을 했기 때문이었다. 음웨푸는 “우리는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경기를 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군부의 계략

아르헨티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군부는 78년 월드컵을 개최하기 2년 전에 권력을 잡았다. 정권 유지를 위한 선전 도구로 월드컵은 최적의 무기와도 같았다. 86년 영국 선데이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군부는 뇌물과 협박 등 갖은 수단을 동원해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만들어냈다. 본선 2라운드에 만난 페루와의 경기. 4강 진출을 위해 페루를 상대로 4골차 이상으로 승리해야 했다.

아르헨티나 군부 지도부는 페루 선수들의 라커룸에 찾아가 “남미가 단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6대 0으로 이겼다. 아르헨티나 군부는 곧 3만5000t의 밀을 페루의 리마로 보냈다. 또 페루 정부에 5000만달러의 ‘무이자 대출’을 해줬다.


이란의 축구 혁명

98년 프랑스 월드컵은 이란에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했다. 이란은 본선에서 79년 이슬람 혁명 이래 불편한 관계였던 미국과 한 조에 속했다. 정치적으로 양국은 긴장감이 맴돌았지만 경기장에서 양국은 친화력을 보여줬다. 선수들은 최대한 상대 선수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꽃과 선물을 주고받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이란의 이미지를 바꿔놓았다. 한편으로 이란 국내에서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란은 2대 1로 미국을 이겼고, 이란의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왔다. 이때 젊은 여성들도 빠지지 않았는데, 남녀가 한자리에 섞이는 것이 금기시되는 이슬람 국가에서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란인 짐 무이르는 “그 일은 소년과 소녀들이 함께 섞일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고, 사회적인 변화가 반영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평화를 위하여

아흐메트 다부토글루 터키 외무장관(앞줄 오른쪽)과 에두아르드 날반디안 아르메니아 외무장관(앞줄 왼쪽)이 지난해 10월10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국교수립 의정서를 교환하는 모습을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과 베르나르 쿠슈네르 프랑스 외무장관, 하비에르 솔라나 전 유럽연합 외교정책 고위대표(뒷줄 오른쪽부터)가 지켜보고 있다. 취리히 | 로이터뉴시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아르메니아와 터키의 지역 예선전에서 양국의 지도자들이 근 1세기 만에 만났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터키에 의해 수십만명의 아르메니아인이 학살당했던 역사가 무뎌지는 순간이었다. 압둘라 굴 터키 대통령은 2008년 자국에서 열린 첫 게임에 참석했고, 아르메니아 대통령은 이듬해 아르메니아에서 열린 양국 경기를 허용했다. 터키와 아르메니아는 지난해 10월 국교 수립 의정서와 관계 발전 의정서에 서명했다. 작가 조지 오웰은 “축구는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말했지만 어떤 경기는 평화를 위한 길목에서 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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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교수, "촛불의 힘이 투표참여로 확대된 게 지방선거 의미"

드라마틱한 6.2지방선거 이후 선거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그중에서 최장집 교수의 인터뷰가 눈에 띄어 실어본다.


[경향 6/16]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인터뷰

- 최근 학술대회에서 자유주의 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왜 지금 자유주의입니까.

“‘이제는 자유주의다’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유주의 관점에서 문제를 보는 게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분단국가 이후 자유민주주의가 새로운 국가의 공식 이념이 됐지만, 그 이념은 냉전 반공주의로 변질돼 권위주의나 군부독재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자유주의는 구호나 슬로건으로만 존재했습니다. 자유주의 전통이 뿌리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민주화가 먼저 됐습니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기틀이 어느 정도 잡혔는데 민주화, 현대사를 생각하면서 자유주의를 성찰할 수 있는 조건이 됐다고 봅니다.”

- 자유주의란 무엇입니까. 보수, 진보 등 여러 갈래의 이념 세력들이 여러 뜻으로 쓰고 있는데요.

“자유주의는 보편적 이념이기 때문에 범위가 넓습니다. 한국 정치를 발전시키려면 선별적으로 추려야 하는 작업이 필요한데요. 우선 자유주의가 인간 역사 발전에서 가장 크게 기여한 게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인간평등의 보편 사상, 즉 자연권 사상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합니다. 두 번째 자유주의 원칙에는 국가 권력을 제대로 견제하는 가치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원칙은 3권 분립이라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로 나타납니다. 또 한국 현실에선 진보파들에게 정열을 식히는 해독제 역할을 하는 측면에서도 중요합니다. (진보파들은) 민주주의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 결과 민주주의가 모두 이뤄낼 수 있다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고 현실적으로 이뤄낼 수 있는 정치에 대한 이해 방법과 태도를 자유주의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 한국의 정치·사회 맥락에서 자유주의는 보수의 용어였습니다.

“고전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는 구분됩니다. 자유주의는 어떻게 정치권력을 제도화하고 인간의 자유·평등을 구현할 수 있느냐는 이론입니다. 로크, 몽테스키외 등은 자율적 시장경제를 지지·옹호한 적이 없어요.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동일하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자유주의는 평등사상입니다. 민주주의 평등사상의 기초는 정치적 평등이고, 1인1표의 대의제가 기초가 되는 건데요. 평등이라고 하는 기본 원리가 동일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하고 상통합니다.”

- 자유주의가 한국에서 하나의 보편 이념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한국 현실을 볼 때 자유주의는 진보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정치적 힘으로 조직·실천하느냐에 따라 사민주의 내용까지 포괄할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 그동안 보수파들이 자유주의 이념의 핵심 요소들, 즉 법의 지배, 법 앞의 평등, 인간 평등사상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자유주의는 정치적으로 이해 관계가 다른 세력을 관용하고, 공존을 강조했던 이념입니다. 이념이 다르다고 서로를 용인하지 않는 태도나 행동 양식들은 자유주의의 가치가 확산될 때 많이 완화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 최근 급진민주주의 등을 강조하는 진보 지식인들의 논의에 비판적 견해를 내셨는데요.

“정치를 ‘냉정한 열정’이라고도 말합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과도한 열정과 결합한 걸 두고 ‘정서적 급진주의’란 말을 쓴 적이 있습니다. 정부와 정당이 보수적으로 되면서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걸 대의제 민주주의의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이상적 대안으로 직접 민주주의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의제 민주주의가 문제가 아닙니다. 대의제는 잘하면 됩니다. 권위주의로부터 민주주의를 만드는 데는, 운동과 같은 급진적 방법이 필요할 때도 있겠지만 민주주의를 운영하고 평상시 실천하는 것과는 방법이 다릅니다. 민주주의는 이익 갈등과 결정에 이르는 설득과 타협이 필연적으로 전제되는 겁니다. 민중주의 이념으로 급진적으로 성취하려는 열정이 얼마나 민주주의 작동 원리와 잘 상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6·2 지방선거의 의미는 무엇인지요.

“많은 사람들이 투표의 힘이 크다는 걸 느꼈을 겁니다. 2008년 촛불집회 때 수백만명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와 정부를 비판·성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투표의) 힘이 더 강하다는 걸 보여준 사례입니다. 민주주의에서 투표만큼 정당성을 강하게 부여하는 게 없습니다. 그간 이명박 정부가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우리는 다수 국민의 힘에 선출된 정부이고, 위임받아 통치하는 것이다. 일부 과격분자 이야기한다고 수용할 수 없다’는 것 아니겠어요. 그 힘을 제약하고 견제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민주주의 투표입니다. 투표 참여 없이 운동 참여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그래서 부족한 거죠. 이번 선거에서 촛불이라는 운동의 힘이 투표 참여의 에너지로 확대된 게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 여당 패배 원인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견제되지 않은 권력이 필연적으로 보여주었던 권력의 독선과 오만에 대한 투표자의 반응이었다고 봅니다. 정부 여당을 위해서도 지난 대선, 총선과 같은 일방적 승리는 좋은 것일 수 없습니다. 민주화를 경험한 많은 시민들에게 현 정부는 여러 측면에서 민주주의 규범과 원리를 존중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4대강 사업, 세종시 문제, 대북정책 등 중대 이슈와 정부정책이 일방적이었습니다. 선거에서 승리한 다수당이라도 민주주의는 항상 시민들의 요구에 반응하는 자세가 필요하고, 공론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국민을 겸손하게 설득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최상층 소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책을 폈고, 대북정책에서 평화와 공존이라는 보이지 않는 넓은 사회적 합의를 무시하고, 전쟁 위협을 느낄 정도로 남북 문제를 악화시켰습니다. 정부 여당이 집권 이후 왜 짧은 시간에 국민을 실망시켰느냐는 문제는 민주화 이후 늘 되풀이된 패턴으로 보입니다. 한국 국가권력이 크다는 것이 중요한 요인이 아닌가 합니다. 반대자들은 물론, 자신의 지지자들의 요구나 의사를 폭넓게 수용하지 않고서도 통치가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는 정치적 자원을 만들어주는 것이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선거 때 투표자들은 쉽게 소외되는 것이지요.”

- 선거 과정에서 민주대연합, 민주 대 반민주 논리에 동의하지 않으셨는데요.

“국가 권력이 강하기 때문에 견제하려면 모든 힘을 다 결합해야 한다고 하니까, 일종의 양당제적 모양새가 만들어졌죠. 이렇게 경쟁 틀이 잡히면 소수 정당, 소수 의사들이 대표될 수 없죠. 그래서 비판적이었던 겁니다. 한국 정치 경쟁 구조에서 견제와 균형을 만들려면 연합이 필요하다는 걸 부정하진 않아요. 다만 이기는 데 가치와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러려면 소수 의사 대표가 제대로 되어야 하고요. 정책 차이를 빼고 무턱대고 연합, 연대를 추진하면 억압적 요소를 가질 수 있습니다. 진보·군소정당에 일방적 후보 단일화 압력을 넣는 건 곤란하다고 봐요. 지방선거에 승리했다고 다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 민주당의 승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이번 선거 결과는 과도한 정부 권력에 대한 중간평가이고, 권력에 대한 견제라고 봐야죠. 민주당이 대안이라 지지한 게 아니라 견제를 위해 소극적 지지를 한 거죠. 국가·정부가 권력을 남용하고, 투표로써 야당이 견제하게끔 하는 게 우리 선거 패턴입니다. 민주당이 다음 총선, 대선에서 이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예요. 쇄신해야 합니다. 한나라당과 비슷한 정책을 갖고 가면 적극적으로 선택하기 힘듭니다.”

- 투표율이 높아졌지만 45% 정도가 투표를 안한 걸로 나타났습니다.

“민주화 이후 한국 정당체제가 시민들의 적극적 선택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정당 체제가 희망을 주고, 요구를 대변할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투표율은 한국민주주의의 현 위치를 보여주는 거죠. 기존 제도권 정당들이 제 역할을 못한다는 말이죠.”

- 선거에서 드러난 건 ‘냉전 이념 불러내기’였던 것 같습니다. 마침 6·15 10주년이기도 한데요.

“정부가 선거 가까이 천안함 같은 이슈를 만들고 여론을 동원하는 스타일을 보여줬는데, 과거 권위주의 정권이 하던 걸 재현한거죠. 퇴행입니다. 지금 온세계가 평화를 지향하고 있는데,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 가능성이 운위된다는 건 곤란하죠. 세계 시대정신이 평화입니다. 남한이 평화 이니셔티브를 쥐고 다른 나라를 설득해도 시원치 않은 판입니다. 지금 다른 나라는 제발 한반도 평화가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하는데, 한국이 나서서 북한을 혼내줘야겠다고 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보수 기득권층들이 너무 쉽게 통치하려 냉전 이념을 불러내요. 시대착오인 거죠. 탈냉전 시기에 맞게 평화적으로 안정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는 틀 안에서 북한을 다루는 게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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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15일 화요일

밥 한 끼 사주고 싶은 너!


<샘터 6월호에 기고한 글>
밥 한 끼 사주고 싶은 너!

가을 전어와 쌍벽을 이루는 봄 도다리를 먹어봤는가. 도다리는 광어와 비슷하게 생긴 생선이다. 광어보다 크기도 작아 회로 먹을 양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맛은 좋다. 도다리 한 점을 입 안에 넣고 오물거리면 쫄깃함․ 담백함이 전해져 온다. 도다리 회 한 접시에 고추장과 배, 쑥갓, 미나리 등을 넣고 물을 조금 부으면 포항 대표음식인 ‘물회’가 된다.

4월 초 나는 도다리 같이 알찬 맛을 지닌 한 기업을 취재하기 위해 포항을 방문했었다. 내가 방문한 회사는 직원이 170명 정도 되는 중소기업이었다. 그곳은 합금철을 만드는 회서였다. 생산과정을 보기 위해 공장에 들렀다. 공장엔 전기로 네 대가 가동되고 있었고 그 안엔 망간, 코크스 등 광물이 불에 활활 타고 있었다. 고로에서 생산된 쇳물은 그 온도가 1500℃나 됐다. 4층 높이에서도 수증기의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런데 자세히 아래를 살펴보니 쇳물이 흐르는 통로 옆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장비를 꼼꼼히 착용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모습은 위태로워 보였다. ‘얼마나 뜨거울까’란 생각이 들자 괜스레 마음이 먹먹해졌다.

공장 방문을 마친 뒤 직원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죽도시장 안의 한 횟집이었다. 내가 “아까 뜨거워서 혼났어요”라고 엄살을 부리자 한 직원이 손을 내밀었다. 검붉게 달아오른 퉁퉁 부은 손이었다. “철강 족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손이 다 이래요. 매일 뜨거운 수증기에 노출되고 금속 독이 올라 이렇게 징그럽게 변해요”란 말과 함께.

포항을 다녀온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 그 투박한 인부들의 손이 떠올랐다. 땀과 수고를 머금은 그 손은 오늘도 힘차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돌아오는 봄엔 내가 그들에게 풍미가 좋은 도다리 한 접시로 밥 한 끼 사주고 싶다. “힘내세요!”

-2010년 5월 중소기업 심팩에이엔씨(SIMPAC A&C) 방문 후-

2010년 6월 4일 금요일

“낭만은 없다. 밥벌이는 현실이다.” -장명국(張明國)내일신문 사장

“낭만은 없다. 밥벌이는 현실이다.” -장명국(張明國)내일신문 사장

‘밥벌이의 지겨움’ 익숙한 문구다. 소설가 김훈은 에세이에서 밥벌이로 개인의 삶이 구조조정으로 해체되고 ‘개혁’이란 이름으로 파편화됨을 염려했다. 김훈만큼 밥벌이의 어려움이에 관심 많은 이가 있다. 바로 장명국 내일신문 사장이다. 장명국 사장은 노동경제학 전문가다. 노동법에 대해 그만큼 쉽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는 ‘밥벌이=노동’이라며 일의 소중함을 역설했다. 물론 그가 주장하는 노동의 목적인 개인의 영욕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밥 한 공기에 고개 숙여야 하는 정도의 비참함을 면피하는 정도랄까.

올해 63세인 장 사장의 얼굴은 ‘노동운동가’라고 하기엔 어딘지 곱다. 남자에게 곱다는 표현이 어색한가. 노동전문가치곤 독기가 없어 보인다고 해야 하나. 모든 일은 순리대로를 외치는 너털한 말투에 기자도 따라 웃게 된다. 상대를 배려하고 도와주는 것, 곧 우리 삶이 그만큼 풍족해지는 길이라는 그. 내공이 장난 아니다. ‘허허실실虛虛實實’ 장 사장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말이다. 밥벌이에 대해 일각연이 있는 장명국 사장과 인터뷰를 시작한다.


1. 밥벌이의 어려움!

장명국 사장은 바쁨 없는 바쁜 일상을 보낸다. 사장이라고 잰 체하는 것도 없다. “내가 마케팅은 좀 잘해”라며 빙그레 웃는 그. 광고영업을 다녀오는 길이란다. 자신을 ‘신문팔이’로 지칭하며 월급 안 받는 사장 노릇은 밥벌이의 어려움 그 자체라고 한다. 원래 소주 반잔이 주량이었는데 기업인, 공무원 등이 폭탄주를 좋아해 자신의 주량도 늘었다고 한다. 지금도 비즈니스를 마치고 오는 길이라고 한다.

동안의 비결을 묻자 장 사장은 “건강관리를 열심히 해. 규칙적으로 살지.” 매일 5시 반에 일어나 7시 전에 출근한단다. 회사에선 제일 먼저 지난 밤 뉴스를 확인하고 1면에 무엇을 실을지 논의하는 편집국장회의에 참여한다고 한다. 편집국 회의가 끝나면 곧바로 마케팅 회의가 이어진다. 광고 영업이 주요 내용으로 신문사 운영의 중요한 업무라고 한다. 이게 다가 아니다. 회의 후 가끔 조찬약속도 있다. 오늘이 그런 경우였는데 약속에 늦지 않기 위해 달렸다고 한다.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일 안했어. 놀았어!”

일하는 것이 즐겁다고 말하는 그. 밥벌이는 어렵지만 부지런히 일관성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다. “흔들림 없이 꾸준히 일하는 것 중요합니다. 그래야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지. 맘먹으면 안 될 일이 없습니다.” 그의 의지는 현장에서도 유명하다. 과거 YTN사장으로 임용돼 적자에 허덕이는 YTN을 3개월 만에 원상 복귀시켰다. 정부는 구조조정을 통해 직원의 50%를 해고하겠다는 강수를 뒀고, 그는 직원 해고 대신 임금삭감이란 비책을 냈다. 간부 50%, 부장급70%, 차장급 60%, 일반직원 50%. 경비 59% 삭감 등 내부 경비 절감을 단행했다. 노사가 단합해 상생을 이뤄낸 좋은 사례로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난 공수부대 출신이에요. ‘원 샷 원 킬’이 내 전법이지. 사실 1년 정도는 걸릴 줄 알았는데 3개월 만에 흑자로 돌아서 나도 놀랬어. 그 바람에 사장자리를 8개월 만에 박차고 나왔지.” 세상살이가 그렇듯 돈 버는 일도 쉽지 않다. 하지만 꾸준히 궤도를 따라가다 보면 답이 나온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2. 낭만이란 없다.

“경기고를 나왔지. 서울대는 따 놓은 당상이었고 학비 걱정도 없었어. 대학 때 처음 마르크스 경제를 배웠어. 당시 한국 경제 상황은 최악이었어. 1960년 1인당 국민소득이 79불, 당시 베트남이 1000불. 우린 진짜 최빈국이었지”

66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한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낭만 따윈 없었다.”라고 말했다. 대학생이 된다는 것, 실업자의 길로 접어든다는 생각이 만연한 때. 대부분 일자리를 찾아 ‘밥벌이’에 나섰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대학생들은 마음 한편에 빚을 졌다고 한다. 편안한 삶을 누리는 대신 열심히 공부해 가난한 조국을 구출해야 한다는 사명감 말이다. 그런 그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노동경제학을 배우기 위해 코넬 대학으로 유학을 준비하던 중, 데모에 휘말려 감옥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을 교부했는데 일이 그렇게 커질 줄 몰랐어. 데모가 나고 주동자가 붙잡혀서 나도 따라 잡혀 들어갔지.”

감옥살이를 한 계기로 노동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됐단다. 특히 어려운 노동경제학을 쉽게 말하는 재능에 강의도 맡게 됐다. 강의를 하는데 수업을 듣던 학생이 미채불임금에 관련한 질문을 했고, 답변을 하기 위해 노동법을 독파하기 시작했다. 노동법 관련 책이 한자로 돼 있어 한글로 써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약 100만부가 팔렸다. 이후 손가락을 잘린 사람, 다리 불구자 등 산업재해를 받은 사람이 산업재해법 관련 질문을 하러 왔다. 그래서 산업재해 관련 연구했다. 이런 연유로 노동법과 구체적 실무까지 꿰고 있어 변호사를 찾지 않는다고 한다. 노동전문가로써 걸어온 길은 그의 의지도 있었지만 의지와 환경이 함께 그를 이끈 것이기도 하다.


3.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노년의 꿈이 궁금했다. 꿈은 두 가지다. 첫 번째 외국신문사를 인수하는 것, 두 번째는 귀농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신문과 농업은 둘다 ‘사양 산업’이다. 장 사장은 “괜찮다. 맘만 먹으면 모든 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표했다. 외국 신문사를 인수하는 것에 대해 그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지는 모두 유대인 회사입니다. 미국 내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고 숨은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선 언론사를 소유하는 게 지름길이지요.” 국내 정치, 경제가 국제 정세의 영향력 아래 있기 때문에 외부 동향을 살피고 정보를 얻는 일이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이란 게 그의 생각이다. 외국 신문사를 인수하기 위한 방안도 이미 구상해뒀단다. 내일신문사처럼 공모주를 모집하는 방법이 바로 그것.

“우리 직원들에게 투자하라고 할 것입니다. 투자금은 배당으로 돌려줄 겁니다. 우리 직원뿐 아니라 교민, 외국인 투자자 등도 다양하게 참여시킬 생각입니다. 되도록 많은 사람이 참여하여 함께 하고 싶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현재 생산량의 1.8배 정도 수확할 수 있다 자신하는 그. 장 사장의 아버지는 농학박사였다고 한다. “FTA 협정에서 가장 민감한 부문은 농업이었습니다. 쌀농사는 수출을 할 수 있어요.” 그는 협동농장을 만들어 농사짓는 즐거움을 함께 느끼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사할린, 베트남에도 수출하여 우리 쌀의 우수함을 알리고 싶단다.

식탁문화가 바뀌고 있고, 신문 산업의 종말을 예고하는 목소리는 많다. 하지만 장 사장은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힘차게 남들이 가지 않는 길로 가려고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좋아하니깐. 자신이 좋아하는 일, 그리고 노동을 통해 스스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삶 그자체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에게 한 마디 격려를 부탁하자, “저는 20대가 가장 똑똑하다 생각합니다. 20대가 정치에 무관심하다 비난하는 이들도 있지만 정치만 없고 권력만 난무하는 정치판이 실질적인 문제”라고 일갈했다. “한 길을 파세요. 10년 정도 한 분야를 꾸준히 연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저것 기웃거리다보면 밥을 못 먹을 수 있습니다. 밥을 못 먹으면 거지가 되죠. 그러면 눈치를 보게 됩니다. 비극이죠. 재밌는 일을 찾으세요. 밥도 먹고 즐거운 일을 찾아서”라고 덧붙였다.

2010년 6월 2일 수요일

박쥐-모던 걸이라!

-태주(김옥빈)를 통해 보는 한국여성의 변화-
태주는 하녀다. 병든 남편을 수발하고,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으면서도 그저 말없이 일할뿐이다. 태주의 집에는 정기적으로 손님들이 방문한다. 식탁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며 마작을 즐기지만 태주는 그저 남편의 핫팩을 데우며, 잔심부름만 한다. 그래서 그녀는 하녀같다.
그런 그녀는 몽유병에 걸린 사람처럼 집밖을 나와 달린다. 그녀가 무작정 뛰는 길의 끝에 어렴풋이 아파트같은 건물이 보인다. 낡고 구닥다리 같은 그녀의 집은 검은 얼굴로 촌스러운 한복을 차려입은 그녀와 닮은 구석이 많다. 내달리던 그 길에서 태주는 상현과 마주친다. 상현의 다정한 손길은 그녀를 조금씩 변화시킨다. 태주는 시어머니에게 봉사활동을 가겠다고 한다. 단 한복집이 문닫는 일요일만 자유를 얻은 그녀는 상현과 달콤한 시간을 보낸다. 상현과의 '섹스'는 그녀를 해방시키며, 태주에 대한 상현의 애정도 커간다.
태주는 이제 마작게임에 참여한다. 조심스럽게 참여하며 그녀는 하녀에서 하나의 인격체로 존재감을 회복해나간다. 신부라는 상현의 직업은 한국사회가 전근대에서 근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공로가 컸음을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기독교와 함께 들어온 자본주의와 근대과학은 한국사회의 '서구화'를 가속화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던 것이 여성이었다는 점에서 태주의 마작게임 참여는 '근대화된 여성'을 상징한다. 물론 성적 자기결정권을 거머쥔 것도 여성의 권리신장을 뜻할지도...
태주는 상현의 질투심을 이용해 무능력한 남편을 죽이는데 성공한다. 거짓말로 자신의 허벅지를 찌르곤 그에게 강우가 그렇게 했다며 상현을 자극했던 것이다. 그녀는 점점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여성이 되어가며, 상현을 이용하는 치밀한 계획성마저 보인다. 태주는 남성을 이용하여 성취감을 맛보는 '모던 걸'로 변신한 것이다.
그러나 거짓말이 들통나고 상현의 손에 죽임당한 그녀는 그로 인해 다시 살아난다. 뱀파이어로....뱀파이어로 재탄생한 태주는 이제 과거의 태주가 아니다. 그녀의 옷차림은 화사하고 얼굴은 아름답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살던 그 집은 흰 페인트로 덧칠된다. 우중충한 과거의 기억들은 흰 페인트로 사라지고, 이제 그녀는 집안에서도 신발을 신는다. CCTV를 거실에 설치하며 그녀의 집은, 현대적인 공간으로 변화한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 하나 있다. 죽은 강우의 어머니다. 그녀는 반식물인간 상태로 그녀를 응시한다. 태주는 시어머니를 죽이려고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하얀 페인트로 덧칠된 세련된 그 공간에 한복을 고이 입은 시어머니의 응시는 아들을 잃은 노모의 한이자, 한국인의 보편정서 "한"을 표현하는 것 같다.
태주에게 남자는 의미가 없다. 그녀에게 남성은 하나의 물건이다. 상현을 온몸으로 꽉 껴안고 사악하고 웃어보이는 태주의 얼굴, 살아있는 먹이가 더 맛있다는 태주의 말, 피를 더 효과적으로 먹기 위해 시체를 빨래처럼 메달아 놓은 그녀의 행동은 현대 여성을 상징한다. 욕망 아니 충동에 따라 스스럼없이 행동하고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 그녀다.
태주의 변신은 한국사회의 변동(전근대-근대-현대)과 함께 변화해온 여성의 모습을 대변한다. 그러나 여성이 제 아무리 권리신장을 하고 모던 걸로 거듭나도 그녀를 끊임없이 주시하는 시어머니의 응시는 여성을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변하지 않는 고정관념일테다. 한마디로 섹스 앤더 시티를 따라 된장녀로 변신해 커피 빈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획득한다고 해도 정체된 한국적 가치관들은 여성의 가치를 재는 척도이며 가부장적인 남성의 가치관은 한국 여성을 구속한다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태주'라는 인물을 통해 어쩌면 한국여성의 변화와 그 한계를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허경영의 무례한 복음

무례한 복음, 이택광( 그중에서 가장 잼나는 것)

허경영 후보의 증상은 확실히 독보적이다.


그가 대선 기간 동안 내세운 공약들은 우스꽝스럽긴 했지만 상당히 '파시즘적인 것'이다.
-박근혜와 결혼할 것이라느니, 아이큐가 430이라느니, 우주와 교신한다느니 하는 가십성 주장들이 훨씬 부각되고 있지만, 국회의원 수를 줄이고 월급을 주지 않으며, 지방자치단체장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겠다는 공약들은 국회를 해산하고 민주주의를 불허하겠다는 것과 유사한 의미다.


물론 누구도 허경영 후보가 이런 공약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내놨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허경영 후보는 그냥 자신의 관점에서 유권자의 귀를 솔깃하게 할 수 있는 파격적인 '한방'을 찾다보니 이런 공약을 내세웠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허경영 후부의 허우맹랑함이 "나만이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다른 후보들의 주장이 얼마나 공허할 수 있는지를 역으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허경영 후부가 반시장주의를 표방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모순은 기본적으로 시장의 상징질서에 내재해 있다.


우리가 목격하는 허경영 현상은 역설적으로 지금 현재 유지되고 있는 사회적 상징계의 불변성을 드러낸다.


(2008년 1월 21일 서울 남부지검, 공직선거법 위반과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허경영 대한 사전 구속영장 청구/12월 24일 대법원, 허경영에게 징역 1년 6개월의 선고 확정)

(2009-12-10 20:00 작성)

종말! 그대는 믿는가?

영화 <2012>는 과연 종말론에 관한 영화인가?

영화를 보던 중 문득 종말론 영화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현재를 재구성해 낸 것처럼 보였다. 무슨 말이냐...2012가 보여주는 세계의 모습이 미국발 금융위기와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혹은 혹사당하는 우리의 모습과 닮았다는 말이다.

먼저, 지구의 핵이 뜨거워져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그 시발점이 미국 서부라는 점이다.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화산폭발이 시작되는 것처럼 금융위기의 시초도 미국이다. 특히 신용이 낮은 서브 프라임 계층의 디폴트 선언으로 금융위기가 시작된 것처럼 평범한 어느 날 불행은 찾아온다. 물론 그 위기의 징후는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다만, 위기를 실제로 겪는 일반인들만 모를 뿐이다.

이렇게 시작된 불행은 예상보다 더욱 파급효과가 크고,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파괴력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놀라 도망치고, TV앞에 서서 정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만 죽음이 문턱에 다가오기 전까지 정부는 '괜찮다'고 말한다. CNN, 즉 언론과 함께

위기상황을 이미 통보받은 거부와 세계 정치인들은 재난을 피해 대피한다. 그곳은 바로 중국이다. 재밌지 않는가. G8국가 정상들과 거부들이 위기를 피해 중국으로 모여든다는 것. 어떤 면에서 금융위기를 피해 핫머니가 중국으로 몰려드는 현상, 미국과 중국이 G2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 유럽연합과 중국, 아프리카와 중국 한국까지 중국없이 살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생존하고 싶다면 중국으로 대피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중국인들도 21세기 노아의 방주에 올라타지 못한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만들지만 그 우주선을 만드는 자본은 러시아, 미국, 유럽 등 세계 국가들의 투자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그저 값싼 노동력을 가진 공장일 뿐이다. 중국을 지렛대로 세계는 또 한번 생존이란 구원을 얻는 셈이다. 어쩌면 금융위기로 피해를 입인 세계의 거부들과 투자가들이 자산회복을 위한 마지막 투자지로 중국을 눈여겨 본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나 궁금한 것은 선택받은 자들(?), 재난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세상이다. 방주에서 내린 노아의 가족들이 다시 인류를 가꾸고 경작하며 생존한 것처럼 살아남은 그들의 삶, 신인류의 모습은 어떨가라는 궁금증 말이다.

(2009-12-02 14:53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