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축구가 삶과 죽음의 문제라고 말한다. 나는 그런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축구는 삶과 죽음의 문제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1981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리버풀의 전설적인 감독 빌 샹클리는 세상을 떠나기 전 ‘축구라는 아름다운 경기의 중요성이 과소평가돼 있다’는 것을 이렇게 지적했다. 이는 축구팬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3S(Sports·Sex·Screen) 정책’이란 말이 있듯이 정치는 축구를 이용해 국민의 눈과 귀를 막아온 역사가 있다. 월드컵이 시작된 후 축구는 혁명의 동기가 되기도 하고,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평화를 받아들이게도 하고, 갈라졌던 세력을 뭉치게도 만들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은 세계사 이면에 어떤 기록을 남길까. 미국 CNN 방송은 최근 남아공 월드컵을 맞아 ‘세계 월드컵 정치사’를 소개했다.
무솔리니의 ‘맨인블랙’
일 두체(베니토 무솔리니 별칭)는 축구를 정치에 ‘악용’한 대표적 인물이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를 1934년 제2회 월드컵 개최지로 선정하는 것부터 월드컵 운영 방식, 심판매수 등 국민들의 관심을 월드컵으로 돌리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무솔리니는 우승컵도 줄리메컵보다 6배 큰 ‘코파델두체’라는 우승컵을 별도로 만들었다. 이탈리아는 우승에 앞서 준결승에서 당시 유럽 축구 강호였던 오스트리아와 만나 2대 1로 승리했다.
오스트리아의 요세프 바이칸은 그 경기를 이렇게 기억한다. “이탈리아전에서는 심지어 심판들도 그들(이탈리아)을 위해 뛰었다. 나는 우리팀 선수를 향해 공을 패스했지만 심판이 앞서 공을 이탈리아 선수에게 밀어줬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치에 굴하지 않은 오스트리아 영웅
30년대 오스트리아 축구 대표팀은 유럽 최고의 실력으로 ‘기적의 팀(wonderteam)’이라 불렸다. 3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나치 독일은 그해 3월 오스트리아를 강제 합병한다. 나치는 독일팀의 실력을 오스트리아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했다. 나치는 오스트리아 선수들을 영입했는데, 주장 마티아스 진델라는 이를 거부했다. 같은 해 4월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시합을 벌인다. 진델라는 “오스트리아가 이겨서는 안된다”는 나치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2대 0으로 승리를 이끌었다. 첫번째 골이 터졌을 때 진델라는 오스트리아 관중 앞에 섰고, 두번째 골이 나왔을 때는 나치 관료들 앞에서 축하 세리머니를 선보였다.
진델라는 이듬해 자신의 아파트에서 연인과 함께 가스 유출사고로 서른 여섯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가 오스트리아 대표팀을 잃고 상실감에 자살했다는 소문과 함께 살해당했다는 음모설이 제기됐다.
독립위해 출전 포기한 알제리 선수들
축구는 알제리의 독립전쟁의 한 방법이었다. 1830년대부터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은 알제리는 1954년부터 민족해방전선(FLN)을 중심으로 8년간 격렬한 독립전쟁을 벌였다. 전쟁 중이던 58년 스웨덴 월드컵을 맞아 프랑스는 알제리 선수들을 자국의 국가대표팀으로 차출하려 했다. 한편으론 알제리인들에게 명성과 부를 누릴 수 있는 하나의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알제리 선수들은 프랑스를 위해 뛰지 않기로 결정하고 튀니지에 있는 FLN 본부로 모였다. 그리고 체포 위험에도 불구하고 ‘불법’ 대표팀을 만든다. 프랑스 프로리그 생테티엔에서 뛰면서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바 있는 라시드 마프루키는 알제리 불법 대표팀 합류에 대해 “주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선택으로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하게 된 그는 “나는 나의 클럽을 버리고, 월드컵에 대해 생각했다. 나의 조국의 독립과 견줄 만한 것인지를…”이라고 말했다.
축구전쟁
69년 중미의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70년 멕시코 월드컵을 앞두고 북중미 최종예선에서 벌인 경기는 말 그대로 전쟁이 됐다. 그해 6월15일 엘살바도르에서 열린 경기에서 원정 응원을 온 온두라스 국민들이 홈 관중들에게 몰매를 맞았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온두라스에선 이를 계기로 엘살바도르인들을 겨냥한 무차별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엘살바도르는 세계인권위원회에 온두라스를 고발했고, 온두라스는 엘살바도르 상품 수입금지로 맞섰다. 8일 뒤 양국은 국교를 끊었다. 7월14일 엘살바도르의 온두라스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됐다. 미주기구(OAS)의 중재로 같은 달 29일 엘살바도르가 무조건 철수했지만 평화협정은 80년에, 국경 확정은 2006년에야 마무리됐다. 이 전쟁으로 5000여명이 희생됐다. 이 전쟁의 이면에는 양국의 영토확장을 둘러싼 국경문제가 있었다. 또 온두라스에서 엘살바도르 이민자들이 경제적 실권을 쥐고 있었는데, 온두라스는 69년 농지개혁을 하면서 엘살바도르인들을 제외하고 추방했다.
두 국가의 군부는 축구 경기장에서의 폭력사태에 관한 소문을 선동하면서 고조된 상대 국가에 대한 반감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목숨 걸고 시합한 자이르 선수들
74년 서독 월드컵 때는 월드컵 역사상 가장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월드컵에 처음 출전한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는 같은 조였던 유고슬라비아에 9대 0이라는 기록적인 골차로 대패했다. 그리고 브라질과의 경기. 3대 0으로 뒤져있던 상황에서 브라질이 프리킥 기회를 얻었다. 그 순간 자이르의 일룽가 음웨푸 선수는 축구 경기의 룰을 망각한 듯했다. 음웨푸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기 전 본인이 공을 먼저 차버렸다. 하지만 해프닝의 이면은 훨씬 어두운 것이었다. 음웨푸의 행동은 모부투 세세 세코 대통령의 충성 부하들이 선수들에게 “만약 브라질에 3골차 이상으로 진다면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협박을 했기 때문이었다. 음웨푸는 “우리는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경기를 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군부의 계략
아르헨티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군부는 78년 월드컵을 개최하기 2년 전에 권력을 잡았다. 정권 유지를 위한 선전 도구로 월드컵은 최적의 무기와도 같았다. 86년 영국 선데이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군부는 뇌물과 협박 등 갖은 수단을 동원해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만들어냈다. 본선 2라운드에 만난 페루와의 경기. 4강 진출을 위해 페루를 상대로 4골차 이상으로 승리해야 했다.
아르헨티나 군부 지도부는 페루 선수들의 라커룸에 찾아가 “남미가 단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6대 0으로 이겼다. 아르헨티나 군부는 곧 3만5000t의 밀을 페루의 리마로 보냈다. 또 페루 정부에 5000만달러의 ‘무이자 대출’을 해줬다.
이란의 축구 혁명
98년 프랑스 월드컵은 이란에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했다. 이란은 본선에서 79년 이슬람 혁명 이래 불편한 관계였던 미국과 한 조에 속했다. 정치적으로 양국은 긴장감이 맴돌았지만 경기장에서 양국은 친화력을 보여줬다. 선수들은 최대한 상대 선수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꽃과 선물을 주고받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이란의 이미지를 바꿔놓았다. 한편으로 이란 국내에서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란은 2대 1로 미국을 이겼고, 이란의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왔다. 이때 젊은 여성들도 빠지지 않았는데, 남녀가 한자리에 섞이는 것이 금기시되는 이슬람 국가에서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란인 짐 무이르는 “그 일은 소년과 소녀들이 함께 섞일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고, 사회적인 변화가 반영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평화를 위하여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아르메니아와 터키의 지역 예선전에서 양국의 지도자들이 근 1세기 만에 만났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터키에 의해 수십만명의 아르메니아인이 학살당했던 역사가 무뎌지는 순간이었다. 압둘라 굴 터키 대통령은 2008년 자국에서 열린 첫 게임에 참석했고, 아르메니아 대통령은 이듬해 아르메니아에서 열린 양국 경기를 허용했다. 터키와 아르메니아는 지난해 10월 국교 수립 의정서와 관계 발전 의정서에 서명했다. 작가 조지 오웰은 “축구는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말했지만 어떤 경기는 평화를 위한 길목에서 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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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리버풀의 전설적인 감독 빌 샹클리는 세상을 떠나기 전 ‘축구라는 아름다운 경기의 중요성이 과소평가돼 있다’는 것을 이렇게 지적했다. 이는 축구팬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3S(Sports·Sex·Screen) 정책’이란 말이 있듯이 정치는 축구를 이용해 국민의 눈과 귀를 막아온 역사가 있다. 월드컵이 시작된 후 축구는 혁명의 동기가 되기도 하고,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평화를 받아들이게도 하고, 갈라졌던 세력을 뭉치게도 만들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은 세계사 이면에 어떤 기록을 남길까. 미국 CNN 방송은 최근 남아공 월드컵을 맞아 ‘세계 월드컵 정치사’를 소개했다.
무솔리니의 ‘맨인블랙’

◀ 1934년 이탈리아월드컵 공식 포스터
오스트리아의 요세프 바이칸은 그 경기를 이렇게 기억한다. “이탈리아전에서는 심지어 심판들도 그들(이탈리아)을 위해 뛰었다. 나는 우리팀 선수를 향해 공을 패스했지만 심판이 앞서 공을 이탈리아 선수에게 밀어줬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치에 굴하지 않은 오스트리아 영웅

마티아스 진델라(오스트리아 선수)
진델라는 이듬해 자신의 아파트에서 연인과 함께 가스 유출사고로 서른 여섯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가 오스트리아 대표팀을 잃고 상실감에 자살했다는 소문과 함께 살해당했다는 음모설이 제기됐다.
독립위해 출전 포기한 알제리 선수들
축구는 알제리의 독립전쟁의 한 방법이었다. 1830년대부터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은 알제리는 1954년부터 민족해방전선(FLN)을 중심으로 8년간 격렬한 독립전쟁을 벌였다. 전쟁 중이던 58년 스웨덴 월드컵을 맞아 프랑스는 알제리 선수들을 자국의 국가대표팀으로 차출하려 했다. 한편으론 알제리인들에게 명성과 부를 누릴 수 있는 하나의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알제리 선수들은 프랑스를 위해 뛰지 않기로 결정하고 튀니지에 있는 FLN 본부로 모였다. 그리고 체포 위험에도 불구하고 ‘불법’ 대표팀을 만든다. 프랑스 프로리그 생테티엔에서 뛰면서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바 있는 라시드 마프루키는 알제리 불법 대표팀 합류에 대해 “주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선택으로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하게 된 그는 “나는 나의 클럽을 버리고, 월드컵에 대해 생각했다. 나의 조국의 독립과 견줄 만한 것인지를…”이라고 말했다.
축구전쟁
69년 중미의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70년 멕시코 월드컵을 앞두고 북중미 최종예선에서 벌인 경기는 말 그대로 전쟁이 됐다. 그해 6월15일 엘살바도르에서 열린 경기에서 원정 응원을 온 온두라스 국민들이 홈 관중들에게 몰매를 맞았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온두라스에선 이를 계기로 엘살바도르인들을 겨냥한 무차별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엘살바도르는 세계인권위원회에 온두라스를 고발했고, 온두라스는 엘살바도르 상품 수입금지로 맞섰다. 8일 뒤 양국은 국교를 끊었다. 7월14일 엘살바도르의 온두라스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됐다. 미주기구(OAS)의 중재로 같은 달 29일 엘살바도르가 무조건 철수했지만 평화협정은 80년에, 국경 확정은 2006년에야 마무리됐다. 이 전쟁으로 5000여명이 희생됐다. 이 전쟁의 이면에는 양국의 영토확장을 둘러싼 국경문제가 있었다. 또 온두라스에서 엘살바도르 이민자들이 경제적 실권을 쥐고 있었는데, 온두라스는 69년 농지개혁을 하면서 엘살바도르인들을 제외하고 추방했다.
두 국가의 군부는 축구 경기장에서의 폭력사태에 관한 소문을 선동하면서 고조된 상대 국가에 대한 반감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목숨 걸고 시합한 자이르 선수들

일룽가 음웨푸(자이르 선수)
아르헨티나 군부의 계략
아르헨티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군부는 78년 월드컵을 개최하기 2년 전에 권력을 잡았다. 정권 유지를 위한 선전 도구로 월드컵은 최적의 무기와도 같았다. 86년 영국 선데이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군부는 뇌물과 협박 등 갖은 수단을 동원해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만들어냈다. 본선 2라운드에 만난 페루와의 경기. 4강 진출을 위해 페루를 상대로 4골차 이상으로 승리해야 했다.
아르헨티나 군부 지도부는 페루 선수들의 라커룸에 찾아가 “남미가 단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6대 0으로 이겼다. 아르헨티나 군부는 곧 3만5000t의 밀을 페루의 리마로 보냈다. 또 페루 정부에 5000만달러의 ‘무이자 대출’을 해줬다.
이란의 축구 혁명
98년 프랑스 월드컵은 이란에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했다. 이란은 본선에서 79년 이슬람 혁명 이래 불편한 관계였던 미국과 한 조에 속했다. 정치적으로 양국은 긴장감이 맴돌았지만 경기장에서 양국은 친화력을 보여줬다. 선수들은 최대한 상대 선수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꽃과 선물을 주고받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이란의 이미지를 바꿔놓았다. 한편으로 이란 국내에서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란은 2대 1로 미국을 이겼고, 이란의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왔다. 이때 젊은 여성들도 빠지지 않았는데, 남녀가 한자리에 섞이는 것이 금기시되는 이슬람 국가에서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란인 짐 무이르는 “그 일은 소년과 소녀들이 함께 섞일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고, 사회적인 변화가 반영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평화를 위하여

아흐메트 다부토글루 터키 외무장관(앞줄 오른쪽)과 에두아르드 날반디안 아르메니아 외무장관(앞줄 왼쪽)이 지난해 10월10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국교수립 의정서를 교환하는 모습을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과 베르나르 쿠슈네르 프랑스 외무장관, 하비에르 솔라나 전 유럽연합 외교정책 고위대표(뒷줄 오른쪽부터)가 지켜보고 있다. 취리히 | 로이터뉴시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아르메니아와 터키의 지역 예선전에서 양국의 지도자들이 근 1세기 만에 만났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터키에 의해 수십만명의 아르메니아인이 학살당했던 역사가 무뎌지는 순간이었다. 압둘라 굴 터키 대통령은 2008년 자국에서 열린 첫 게임에 참석했고, 아르메니아 대통령은 이듬해 아르메니아에서 열린 양국 경기를 허용했다. 터키와 아르메니아는 지난해 10월 국교 수립 의정서와 관계 발전 의정서에 서명했다. 작가 조지 오웰은 “축구는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말했지만 어떤 경기는 평화를 위한 길목에서 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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